초밥님 (@chorice0229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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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나. 저 내일 전학 가요. "
방금 학교를 마치고 바다 위 하굣길을 걷다가 라더가 말했다. 샛노랗던 태양이 점차 바다 너머로 사라지며 붉게 타오르던 배경을 등에 두고 말했다. 그 태양은 바다도 피처럼 붉게 물들였고 하늘에조차도 저의 붉음을 번지게 하고 있었다. 파랗던 것들이 타오르는 모습은 참 라더를 닮았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이. 강렬한 인상의 배우와 그에게 꼭 맞는 배경이 펼쳐진 모습이 한가득 드러났다. 라더의 단순한 말 몇 마디를 듣는 상대는 그에게 색을 침범당한 파란을 닮아 있었다. 하늘에 오르고픈 바다라고 했다. 그런 잠뜰이 라더가 보내는 말이 닿는 상대였다.
잠뜰은 일렁이는 빛에 잠시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흐릿한 잔향이 여지껏 느껴졌다. 메아리치듯 들리는 라더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진 않았지만, 적어도 잠뜰에게만은 그랬다. 영화에 몰입하는 관객마냥. 자신은 그 영화의 주인공이 아님에도 착각을 불러일으켜 열띤 환호를 하는 것 처럼 잠뜰은 꽤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물론 잠뜰은 관객이 아닌 배우의 위치였을 테고, 또 환호를 하지도 않았다.
잠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하는 단답조차도 없었다. 그저 사라져가는 구름을 뒤로 하고 저의 빨간 빛 맴도는 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 모자를 돌려 쓰고 라더를 지나쳐 바다 위 길을 타박타박 소리 내며 걸어갔다. 라더에게는 옅은 바람이 불었고 이윽고 눈앞에선 잠뜰이 사라졌다. 라더는 가방을 고쳐 메고는 작은 한숨을 흩어지게 하고서야 천천히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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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더야. "
다시금 어제의 배경에 접어들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어제와는 다르게 하늘은 푸르렀다. 태양은 파란에 집어 삼켜져 겨우 저의 빛을 빛내고 있을 뿐이었다. 하늘만이 자신의 색을 세계에 흩뿌리고 있었다. 학교가 전날보다 3시간 정도 일찍 마쳐서. 자세한 사항은 어른들의 사정이니 무시했다. 그야 잠뜰은 아직 어른도 아녔고 마치면 마냥 좋은 때였다.
이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없었다. 구름이 가득하게 펼쳐진 하늘 아래. 파도 없이 잔잔한 물결과 춤추는 바다가. 그 위에 하늘빛 조명을 받으며 하굣길을 걷는 잠뜰의 곁에는 라더가 없었다. 라더는 어제 전학을 갔으니까. 그래서 해도 워낙 늦게 지고, 붉음도 사그라들었을지 모른다. 일개 학생이지마는 그럴 거란 생각을 해 보았다. 잠뜰은 그런 생각을 하다 바다를 바라보았다. 울타리 하나도 없었다. 그곳에 걸터앉아 잠뜰은 손을 집어넣고 이리저리 휘저었다. 본인의 손에 의해 자그마한 파도가 일었다 다시 사라진다. 잠뜰은 부드럽게 손을 감싸오는 물결을 잠시 맞이하다 움직임을 멈췄다. 전해지지 않은 말을 이어갈 상황이었다. 결국 이 말조차도 라더에겐 닿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잠뜰은 어제 라더의 말에 대답해주지 않은 것을 후회하진 않았다.
" 드디어 라더 네가 날 놔주는구나. "
잠뜰이 바다에 얹은 손에서 일어나는 물결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만화에서나 본 듯한 투명한 기운으로 그저 바다에게 스산함을 안겨주었을 뿐이다. 잠뜰은 하늘이었다. 자신도 그러길 바랐다. 하늘이었지만 그 속이 짙은 파란이라서 잠뜰은 라더에게 바다 같다고 불렸다.
작년 여름방학 실수로 발을 헛디뎌 바다에 빠진 그날. 라더는 잠뜰의 흩어짐을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 주위를 맴돌았다. 잠뜰은 알았다. 라더가 얼마나 유약한 정신 상태를 지녔는지. 잠뜰은, 정확히는 라더가 만들어낸 환상 속의 친절한 그 잠뜰은 계속해서 라더의 곁에 머물러주었다. 라더가 직접 본인을 떠나겠노라 선언할 때까지.
그리고 어제. 드디어 해방이었다.
잠뜰은 손을 거두고 그대로 바다에 빠졌다. 풍덩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저 더욱 차가워질 뿐이었다. 이것조차도 누군가가 만들어낸 행동이겠지만 말이다. 결국 그의 생각 속에서 잠뜰은 마지막까지 바다와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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