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몬   향 기

꾼님 (@Kkun_522)

교통사고, 죽음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뭐야. 덕개, 네가 웬일로 지각을 안 하고 여기 서 있냐?

또 그러네. 누나는 맨날 그러더라? 내가 언제 지각을 했다고 그러는데.




내가 본 것만 한... 5번? 생각나는대로 기억 왜곡하지 마, 누나. 들켰네. 학교 후문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 서 있는 노란색 유치원 건물에 기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원래 같이 가는 정공룡을 평소처럼 기다리는 게 심란한 건지 한숨을 푹 내쉬고 있는 박덕개를 평소와 다름없이 혼자 등교하던 박잠뜰이 발견하고 장난을 걸었다. 박덕개는 이런 일이 한 두번이 아닌지 익숙하게 반복했고, 박잠뜰은 넉살 좋게 웃으며 인정했다. 박덕개는 옆에 있는 박잠뜰을 흘끔 보는 채도 하지 않고 그냥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누나, 그냥 얼른 등교나 해. 야! 지금 갈 거야, 하여간 귀찮게 하는 건 싫어해가지고.




애가 원래 저러지 않았는데 진짜, 사춘기도 아니고, 나중에 놀아달라고 하기만 해봐라. 다 들려. 들으라고 한 소리야! 박잠뜰이 박덕개를 지나치면서 불만스럽게 투덜거리자 박덕개가 툭 던지듯 한 말에 박잠뜰이 아까보다는 큰 목소리로 대꾸했다. 박잠뜰은 대답이 없는 박덕개를 속으로 험담하며 학교 후문으로 가기 위해 옆에 있는 긴 횡단보도 앞에 섰다. 학생들이 보편적으로 등교하는 시간보다는 꽤 빠른 시간이었기에 그 앞에 서 있는 건 박잠뜰 뿐이었다. 그 횡단보도가 유치원과는 고작 10걸음 정도 떨어져있기 때문인지 옆에 속도를 줄이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야, 박덕개. 이거 받아.


뭐?




박덕개가 갑작스럽게 몸을 뒤로 돌려 막대 사탕을 던지는 박잠뜰에게 뭐냐고 물을 틈도 없이 근처 슈퍼에 널려있을 법한 레몬맛 사탕이 박덕개와 박잠뜰이 사이를 가로질러 그에게 향하고 있었다. 아이씨, 좀 말하고 던지던가! 박덕개는 손에 있던 핸드폰을 차마 떨어뜨리진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쥐어 날아오는 사탕을 손으로 받아내었다. 뭐야, 잡았네. 못 잡길 바라고 있었냐? 내심 아쉬워보이는 박잠뜰의 표정을 발견한 박덕개는 어이없단 말투로 말했다.




박잠뜰은 박덕개의 반응이 재밌었는지 빨간불을 띄는 신호등 옆에서 장난스럽게 킥킥 웃고있었다. 그걸 본 박덕개는 다 때려치우고 꿀밤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그 짧은 새에 수도 없이 했다. 박덕개는 평소에 레몬 사탕을 입에 달고 다니는 박잠뜰의 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막대 사탕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이걸 집에 얼마나 쌓아두고 있을지 가늠도 안되는 박잠뜰에게 소심하게 항의했다. 나는 콜라맛이 좋아, 바꿔줘. 레몬이 짱이거든? 그냥 먹어.




그 사이에 도로와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던 차들의 움직임이 빨간불에 멈추고, 박잠뜰이 서 있는 횡단보도 신호등이 밝은 초록빛을 띄웠으나 박잠뜰은 박덕개를 더 놀리고 싶었는지 지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잠뜰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는 일에 순간적으로 표정을 구긴 박덕개가 박잠뜰의 뒤를 가리키며 답잖게 소리쳤다. 얼른 지나가기나 해! 얼른! 박잠뜰은 박덕개가 순전히 빨리 자신을 보내고 싶어하는 줄로만 알았기에 오기가 생겨서 지나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이 쓸데없이 진지했던 탓에 건널 수밖에 없었다.




그래, 뭐, 아무튼... 정공룡 오면 너나 지각하지 말고 와!


지각 안 한다고!




박잠뜰은 또 지각 얘기를 꺼내 박덕개가 발끈하자 아까처럼 애같은 웃음을 가지고 몸을 돌려 횡단보도를 건넜다. 박덕개는 아깐 그렇게 핸드폰만 쳐다보더니 지금은 박잠뜰이 길을 잘 건너나 꼼꼼히 확인하고 있었다. 일단 박잠뜰의 가방은 오늘도 연한 하늘색이었고, 가방은 무슨 교과서를 그렇게 많이 가지고 다니는지 한 눈에 봐도 묵직했다. 저러면 걷는 속도고 뭐고 다 느려질 게 분명했다. 그리고 박잠뜰이 아무 일 없이 횡단보도를 건너 반대편 인도를 밟았을 때, 박덕개는 무슨 뜻일지 모를 한숨을 푹 내쉬고 아까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다시 꺼냈다. 7시 31분이었다.




사실 박덕개는 핸드폰을 보면서 영상이나 게임에 집중하기보다 시간을 더 집중해서 쳐다보고 있었다. 이유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는 박덕개 본인만이 알았고, 핸드폰을 다시 쳐다본지 2분도 되지 않아 아까 박잠뜰이 건넜던 횡단보도를 어떤 대형 트럭 하나가 가로질러서 초록불임에도 그냥 지나갔다. 가장자리 쪽에 사람이 건너려고 하고 있었는데도 그 트럭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쌩 지나가버렸고, 박덕개는 그걸 옆으로 힐끔 쳐다보고만 있었다. 횡단보도 반대편 가장자리에서 중간 쪽으로 넘어가려고 했던 남자는 매너를 좀 배우라며 차 뒤에 화를 내고 있었다.




박덕개는 아까 박잠뜰이 주었던 레몬 사탕을 물끄러미 봤다. 아무리 봐도 박덕개의 입맛을 생각해주려고 하진 않은 것 같았다. 내가 이 누나한테 뭘 바라. 박덕개는 그렇게 생각하며 사탕 껍질을 벗겨 입에 집어넣었다. 바로 입에 퍼져나오는 인공적인 레몬 향에 박덕개가 또 표정을 구겼다. 이래서 레몬 사탕이 싫었다. 시고, 시고, 또 셨다. 박덕개는 항상 박잠뜰을 보면서 저런 걸 어떻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거냐며 말을 얹곤 했다.




정공룡은 아파트 단지에서 나타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박덕개는 그것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핸드폰 시계는 지금이 아침 7시 34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박덕개는 아무리 맛봐도 시기만 한 사탕을 뱉지도 못하고 그냥 입 안에서 굴리기만 하고 있었다. 아, 하여간 센스가 없다니까. 박덕개는 지금까지 이 한탄을 몇 번이나 했는지 세어볼 수도 없었다. 참 익숙한 기분이었다.




그러던 박덕개가 시간이 7시 36분으로 지나가는 걸 멀쩡히 서서 보다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급히 들었다. 입 안에 돌아다니는 신 맛이 정신을 어느정도 깨워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그의 눈 앞에 아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남자가 씩씩거리면서도 이제는 인도를 걷고 있는 것과, 아까 무작정 길을 건너던 대형 트럭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박덕개의 머리가 어떤 익숙한 기억을 밖으로 꺼내들었다. 심장이 순간적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들리는 것마저 선명하게 들리지 않으려고 했을 때.




빵빵! 하며 갑자기 울려퍼진 자동차 경적 소리가 근처에 크고 오래 머물었다. 박덕개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으로 손에 들고 있었던 핸드폰을 힘없이 바닥에 떨어뜨렸다. 박잠뜰이 길을 건너서 거의 2분만 더 걸으면 나올 후문 바로 앞 횡단보도로 향해서 간 게 31분이었고, 제정신 아닌 대형 트럭이 횡단보도를 지난 게 아마도 32분이거나 33분이었을 것이었다. 그걸 생각한 박덕개의 앞에 조금 있으면 진절머리가 날 것 같은 만큼이나 익숙한 수많은 시간이 31분과 33분을 향하며 흘러지나갔다. 레몬 사탕은 아직 입에서 녹지 않았고, 박덕개는 이 정신없고 심장 철렁한 감각을 몇 번이나 경험해본 적 있었다.




이번에는 어떤 시민이 놀라서 소리지르는 소리가 다시금 주변에 퍼졌다. 박덕개는 혼란스러운 몸과 마음으로 뒤에 떨어진 핸드폰을 돌아봤다. 핸드폰은 바닥과 부딪혀 부서져 있었고, 레몬 사탕은 박덕개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딸딸하게 만들어 조금 덜 슬프게 해주고 싶은 건지 너무 셨다. 박덕개가 많은 감정이 뒤섞인 심정으로 한숨을 쉬면서 잠깐 눈을 감았다.




하...




그리고 눈을 떴다. 박덕개는 얼룩진 유치원 건물에 기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입에 들어있었던 레몬 사탕은 없었다. 그러나 향기는 아직도 남아있었다. 켜져 있는 휴대폰 화면에 보여지고 있는 시계는 지금이 아침 7시 24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또 돌아왔다. 이미 몇 십번이나 경험해본 상황이었다. 박덕개는 지금 이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리고 어떻게 될지 불 보듯 알 수 있었다. 입 안에 돌아다니는 레몬 향이 가식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박덕개의 앞에,




뭐야. 덕개, 네가 웬일로 지각을 안 하고 여기 서 있냐?




해맑게 자신을 쳐다보며 말을 건네는 박잠뜰의 목소리가 들렸다. 헛웃음이 나오려던 걸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박덕개는 다시, 또 다시, 천천히 고개를 올려 자신의 앞에서 몇 번이나 마주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박잠뜰에게 말했다. ...또 그러네.




내가 언제 지각을 했다고 그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