냬나님 (@HSRD_heptagram)
김각별은 천재다. 흔히들 말하는 정의 그 자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 날 때부터 이미 뛰어나서 그 누구도 그를 뛰어넘지 못했던 사람. 재능으로 거머쥔 일 등, 그 자리를 평생 동안 견고하게 유지할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라더는 각별을 그리 정의했다. 천재. 단 두 글자. 너무나 많은 것이 축약되어 있지만 그렇기에 그 무엇보다 더 각별을 완벽하게 나타낼 수 있는 단 한 단어의 수식어구. 김각별은 완벽한, 천재다.
라더는 범재다. 평균에 비해서는 아마 조금, 우수할지도 모르지만 딱 그것이 제 태생이었던 사람. 천재라 불리는 이들과의 간극을 메꾸기 위해 직접 이를 악물고 노력해야 했던 사람. 그렇게 악착같이 기어올라온 이 등 자리엔 언제나 천재, 의 그림자가 져 있던, 그랬기에 항상 태양빛을 온몸으로 받아내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그것이 라더였다. 그리고 평균치 사이에 끼어있는 우수한 이는 언제나 눈에 띄기 마련이다. 각별과 라더는 그리 만났다.
초등학교 일 학년 때 처음 마주쳤던 각별은 라더에게 넘어야만 하는, 그러나 결코 넘을 수 없는 산임에 틀림없었다. 각별은 항상 백 점 시험지를 흩날렸으며 그럼에도 방과 후엔 항상 라더와, 라더가 학원을 가는 날이면 제 또 다른 친구들과 신나게 분식집을 돌곤 했다. 학년이 올라가며 라더를 포함한 제 친구들이 바빠지자 각별은 게임에 빠지기 시작했다. 라더는 그런 각별을 보며 악착같이 공부했다. 각별이 제가 먹은 떡볶이 컵을 쌓아 올릴 때 라더는 빈 샤프심 통을 쌓았고 각별이 게임 출석 체크로 보상을 받고 웃을 때 라더는 차근차근 올라가는 제 시험 점수를 보며 웃었다. 그러니까, 딱 거기까지였다.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야
나 내일 피방
미안한데 우리 시험 다음주
됐다 김각별한테 내가 뭐라 하겠냐 놀아 걍 쳐 놀아
각별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약속을 깰 때면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제 사정을 통보하곤 했다. 라더는 이미 십일 년 째 지겹게 지켜봐온 각별의 그 당황스러운 방식에는 딱히 토를 달 생각이 없었다. 그럴 시간에 제 일 하나 더 하는 게 훨씬 이익이라는 사실을 진즉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더해, 독서실 약속은 각별이 가장 많이 어기는 약속 중 하나이기도 했다. 평소엔 당일 약속시간 직전에 ㅈㅅ, 딱 한 마디 보내면 라더는 언제나처럼 그러려니 하고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채 독서실로 걸음을 옮기곤 했다. 그러니까, 오늘처럼 무려 하루씩이나 미리 연락을 던져주는 날은 오히려 라더가 감사해야 할 판이었단 소리다. 역시나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는 라더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교복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학교 아래 골목 상가의 문구점에 들어갔다. 각별의 생일은 항상 중간고사 시즌에 겹쳐 있었기에 거창하게 챙겨주기에 버거웠다. 그럼에도 라더는 언제나 작은 선물을 하나씩 사서 건내곤 했다. 물론 각별은 놀 것 다 놀고 할 것 다 하고 생일까지 완벽하게 챙겼다. 매년. 라더가 독서실에서 문제집 한 장 더 넘길 때 각별은 혼자서든, 혹은 시험이고 자시고 공부 안 하는 친구들이랑 함께든 즐거운 생일을 보내곤 했으니까. 라더도 아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제 생일이 가까워진다 싶으면 유달리 약속을 많이 깨는데다 십 년 쯤 봤으면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 하는지 알 만 했던 탓이었다. 여하튼, 덕분에 라더와 각별은 둘이 매 붙어 다녔으면서도 정작 각별의 생일을 함께 거창하게 축하해본 기억이 많이 없었다. 마지막은 아마 초등학교 삼 학년 때 쯤이었던 것 같다고, 라더는 그리 기억했다.
각별이 그렇게 이리저리 쏘다니며 즐거운 청춘을 즐기고 있을 때 라더는 하루 종일 학교랑 독서실에 처박혀 살았다. 햇빛보단 형광등으로 광합성하는 게 익숙했고 손에는 굳은살이 잔뜩 박히다 못해 생기고 문드러지고 또 생기기를 반복했다. 시험 직전이 되면 손가락에 힘이 다 빠져 펜을 쥐고 고무밴드로 손을 감고서 문제를 풀었다. 매년 쌓이는 문제집이며 공책은 해를 넘길수록 그 높이를 더해갔다. 한켠에 늘어진 빈 샤프심 통이며 다 써서 잉크가 안 나오는 볼펜에 뿌듯함을 느끼던 시절은 이미 한참 지나 있었다. 그럼에도 라더의 책상 서랍 한구석에 다 쓴 필기구가 모여 있던 것은 제 노력의 확인이었다. 라더는 언제나 가시적으로 노력의 결과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했다. 손목에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을 때까지 펜을 놓지 않던 것은 이 탓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정점을 찍은 성적에 더 이상 변동이 없자 흔들리기 시작했던 제 자신을 잘 알고 있기에, 라더는 그렇게 버텼다. 제 십이 년 학창시절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라던가 성적의 최고점에 달하지 않으면 해소되지 않을 것만 같은 불안감은 언제나 제 한켠을 잠식하고 있었다. 라더는 나름대로 제 불안과 싸워 이겨내는 법을 터득한 편이었다. 단지 그 과정이 미칠 듯 악독하고 치열해서 조금 많이 안쓰러워 보인다는 것만 빼면, 라더를 동경하는 이들은 참 많았다. 아마 그 중 한 8할은 활발하고 성격 좋은 노력파 전교 이 등이라는 겉모습에 반한 것임이 틀림없었겠지만. 라더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방식으로 저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은 제 자신과 김각별 중 각별을 선택할 것이라는 사실은 참 명백했고, 그런 만큼 라더의 심장을 도려내곤 했다. 결국엔 다시 원점이었다. 라더는 각별을 앞질러야 했다. 그러니까, 십일 년 째. 여전히.
그럼에도 둘은 친했다. 매번 새 학기가 시작되면 새로운 담임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셔서 비장하게 나누어주는 자기소개서. 나열된 항목 중 항상 있는 우리 반 친한 친구 다른 반 친한 친구에 각별과 라더는 서로의 이름을 빼 본 적이 없었다. 종종 친구들이 너희 둘은 왜 이 악물고 싸울 것 같이 생겨서는 그렇게 친하냐고 물으면 대체로 라더는 부정했고, 각별은 수긍했다. 그러니까 라더는 후자를 부정했고, 각별은 전자를 수긍하는 편이었다. 라더가 자기가 저 새끼랑 어딜 봐서 친하냐고 버럭 소리를 치면 각별은 그 옆에서 눈만 끔벅이다 저 새끼가 나를 죽이려고 들긴 하지. 뒤에서 칼 갈고 있는 거 같음.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질문을 들을 때마다 둘은 함께 있었으며 저 대화가 끝나면 각별이 라더를 끌다시피 데리고 매점으로 향하고 그걸 또 순순히 끌려가주는 라더의 모습에서, 그러니까 둘 다 거짓말을 하고 있단 사실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완벽, 한 거짓말이 들켰단 건 자기들 빼고 다 알았는데. 공룡은 둘에게 구태여 그 사실을 전해주지 않았다.
언제는 각별이 라더에게 물었다. 서라더. 왜. 너 혹시 호구새끼야? ... ... 너 네가 나한테 하는 짓이 호구 아니면 안 받아줄 개짓거리라는 자각은 있구나? 그 정도쯤이야 뭐. 닥쳐. 알면 바른생활 하던가. 싫어. 이 새끼가. 뭐. 아니야. 말을 말자 내가. 김각별 상대해서 피곤한 건 또 난데 왜 이러고 있냐. 입 다물고 공부나 해 너. 어엉. ... ... ... 라더야. 아 또 왜. 나 배고픈데 매점 가자. 우리 도서관 온 지 한 시간 됐어. 내가 분명 아침 먹고 오라고 말했고. 너 조용한 거 부담스러워서 싫어하는 거 알고 무려 시험기간에 열람실 자리 잡아 둔 거 버리고 휴게실까지 나왔어 내가. 너 혼자 다녀와. 오키. 넌 뭐 먹을래. ...커피나 사오던가. 엉야. 라면 사와서 내 앞에서 먹으면 죽을 줄 알아. 오늘 죽겠네. 이자식아.
라더는 각별에게만 언제나 항상 그랬다. 그러니까 아닌 척 하면서 각별에게만 호구처럼 당해주고 잘해주고 그랬다. 고 삼 마지막 내신시험 끝나기 전까지 그렇게 간절하게 바라는 목표가 전교 일 등이라는 전교 이 등이 전교 일 등한테 멍청하게 잘해준단 소리다.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라더는 대충 웃다 답했다. 저 새끼 자기가 이겨먹은 다음에 다 되갚을 거라고. 자기도 이 징글징글한 짓이 너무 지겹다면서 그러니까 얼른 자기가 일 등 할 거라고. 모두는 그냥 쟤가 스스로 전교 이 등 때려치고 빨리 일 등 하고 싶은 이유를 하나 더 만든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할 뿐이었다.
전교 석차 2.
분명 이번에도 익숙한 숫자를 볼 게 뻔했다. 라더가 입술을 깨물었다. 김각별 그 자식이 틀렸을 리는... 없겠지. 각별은 이번에도 당당하게 빨간 동그라미가 가득한 시험지를 가방에 쑤셔넣고 게임이나 하러 갔을 테였다. 잇새로 얇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래. 다음. 기말고사에는 노려보자.
라더가 책상 위에 마지막 과목이었던 화학 시험지를 내려놓았다. 그나마 가능성 있는 게 1학기 중간고사인데. 각별의 생일이 겹쳐 혹시나 마음이 동하진 않을지, 들떠 있는 감각에 삐끗하고 실수하지 않을지. 그러면서도 제 실력으로 올라서야 한다는 생각에 고개 한 번 흔들고 볼 한 번 짝 쳐내고 가방을 정리하는 순간. 한숨이 푹 나왔다. 오답 하고 틀린 이유 분석하고... 시험이 끝났다는 사실에 신나서 가방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 교실을 나서는 같은 반 아이들이 내는 소음이 마치 꿈결의 것처럼 먹먹하게 들려왔다. 거칠게 파일 안에 제 시험지를 집어넣은 라더가 가방을 들어올렸다. 집에 가면 침대에 눕고 싶어질 게 뻔해 간단하게 밥만 때우고 독서실로 바로 자리를 옮길 생각이었다. 문득 라더의 시야에 시끄러운 운동장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 놀 시간이 어디 있어, 너한테. 머릿속에서 소리가 윙윙 울린다. 서라더~! 그 위로 시끄러운 목소리가 겹쳐 들려온다. 정공룡? 야. 시험 잘 봤냐? 아 뭐 하긴. 서라더한테 물어봐서 뭐 해... 너는. 그런 거 물어보는 거 예의 아니다. 지는 물어봤으면서... 너는 전교권이잖아 이 자식아. 됐고. 우리 밥 먹으러 가자. 독서실 갈 거야. 진짜 너 한결같이 미친놈이냐? 알겠으니까 밥만 먹자고. 너 오늘 아니면 시간 안 내 줄 거잖아! 그럼에도 언제나 한결같은 제 친구에, 라더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알겠으니까 좀 조용히 해 머리 울린다.
나 김각별이랑 약속했다. 뭘 또. 하굣길에, 라더가 공룡에게 말했다. 그 새끼 이기기 전엔 안 죽기로. 어어 그래. 근데 그걸 왜 본인이랑 약속해? 그냥 그렇다는 거지. 일종의? 선전포고. 십일 년 째? 닥쳐 좀. 공룡이 킥킥 웃었다. 라더에게 저와 각별의 관계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도, 놀릴 수도 있는 유일한 타인. 아무리 그래도 라더가 화를 내지 않는 건 공룡과 각별, 딱 그 둘이었다. 이유를 물으면 셋 다 모른다고만 했다. 물론 라더는 부정을 담아서, 공룡은 라더가 혐오할 만한 애정을 담아서, 그리고 각별은 언젠가 제가 그 화를 다 맞을 거란 걸 아는 듯 웃으며 그렇게 답했다. 전에도 말했지 않냐 내가. 으응. 그 자식 이기기 전엔 안 울거야. 안 죽고 안 도망치고 졸업도 안 해야지. 그건 좀. 너 대학 안 갈 거임? 서라더가 재수하는 건 인생 일 년 낭비다. 재수는 수험생 생활에 후회 남는 거 있을 때 하는 거고. 애초에 너 재수한다고 해도 이거보다 더 열심히 못 해. 이 형님이 어? 조언해주는 말 들어. 아깝게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너. 아니? 김각별 그 자식이 전교 일 등이면 내 고등학교 인생은 의미가 없어, 예예 그러시겠죠. 됐다. 내가 너한테 뭔 말을 하겠냐. 알면 좀 닥쳐. 네에~.
공룡이 툴툴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시험이 막 끝난 평범한, 지극히 평범한 목요일 오후의 일이었다.
금요일.
각별이 라더를 불렀다. 서라더. 왜. 각별은 구태여 시험 성적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물론 결과가 어쨌든 각별과 라더가 시험이 끝난 뒤로 틀어지는 일은 언제나 없었으나. 암묵적인 약속이었을지, 각별은 항상 시험이 끝난 주간이면 라더에게 먼저 성적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라더가 제 성적을 정확히 꿰고 있을 거란 자신이었을까, 혹은 라더를 위했던 각별의 배려였을까. 확실한 것은 몇 년 전 실수로 두 문제를 틀렸던 각별이 이번엔 제가 이 등이라며 꽤나 당당하게 라더에게 성적을 말했을 때 제가 마주했던 라더의 표정이었다. 웃지 못하던 눈. 각별을 담던 거뭇하게 죽은 눈. 각별은 그것을 기억했다. 뼈저리게.
오늘 학교 끝나고 시간 돼? 야자 없잖아. 안... 네가 될 리가 없겠지. 그냥 잠깐 비워 놔. 잠깐이면 돼. 안 된다니까. ... ... ...
각별이 눈을 끔벅이며 라더를 바라봤다. 왜냐는 질문으로 응수하려던 라더는 문득 각별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착각에 휘감겼다. 왜. 뭔 일인데. 그냥 그런 게 있어. 장난해? 진짜로. 이따 수업 끝나고 올라와. 옥상에서 보자.
라더가 웬 옥상을 가냐며 각별에게 따지려 했으나 각별은 이미 등을 보인 참이었다. 라더는 잠시 그 머저리같은 뒷모습을 노려보다 제 교실로 자리를 옮겼다.
근데 옥상은 왜 온 건데. 어차피 문 잠겨 있지 않냐? 아니. 키 받아왔지. ...그걸 받을 수가 있어? 세상엔 다 방법이 있어 라더야. 훔친 거 아니지? 미쳤냐? 시시콜콜한 대화가 오가고 각별은 옥상 문을 열었다. 마침 해가 질 시간이었다. 주홍빛의 하늘이 아름답게 둘을 맞이했다. 하늘 예쁘지? 그러네. 꼭 너 색 같다. 뭐래 진짜. 각별이 작게 웃었다. 이어 몇 걸음 나아가 옥상 난간을 부여잡고 섰다. 여기 풍경 진짜 예쁘다. 서라더 빨리 와서 봐 봐. 라더가 눈을 가늘게 떠보이며 각별을 따라갔다.
빨간 하늘. 지는 해. 빛나는 풍경. 익숙한 전경. 그 위에 올라선 각별이 두어 번 입을 달싹였다. 라더가 그를 힐끔거리다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라더야.
응.
나 전학 가.
응... 응? 뭐라고? 뭘 가? 라더가 고개를 홱 돌렸다. 새빨간 햇빛을 양껏 받아내는 각별은 부서질 듯 빛나고 있었다. 처음 올라와 본 학교 옥상에서, 담담하게 이별을 통보하는 각별에게, 지는 해는 마치 라더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일렁이는 붉음이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듯 울었다. 한참을 정적. 라더는 무어라고 말의 서두를 시작할 지 감을 잡지 못했다. 마침내 입을 열어 뱉은 것은 짤막한 한 글자였다. ...왜?
뭐. 별 건 아니고, 나도 좀... 음, 그냥, 뭐랄까. 각별이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너처럼 살고 싶어서? 라더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진짜야. 너처럼 목표를 좇아서 그렇게... 악착같이 살면. 어떤 기분인가 싶어서. 그런데 그걸 내가 너한테 물어 볼 수는, 없잖아. 각별이 두어 마디를 덧붙이고선 시선을 떨궜다. 내려다보이는 운동장에선 여전히 아이들이 신나게 축구를 하고 있었다. 라더는 속이 뒤집어질 것만 같았다. 막혔던 숨을 느릿하게 뱉었다. 침음이 함께 섞여들어 튀어나왔다. 각별이 눈을 깜빡였다. 그냥 좀 예전부터 생각했던 거였어. 너한테는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갑작스럽게 정해진 건 아니야. 언젠가는 할 선택이었고, 그게 지금이 된 거 뿐이야 그냥. 그렇게 말하는 각별의 표정이 너무도, 너무도 후련해 보여서. 새로움과 그 시작에 대한 동경과 황홀로 가득 차오른 눈동자를 라더는 차마 붙잡아 끌어내릴 수 없었다. 붉은 하늘을 비추는 각별은 행복해 보였다. 그렇기에, 그렇기에 라더는. 라더는 각별을 응원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제가 동경했던 것은 정상에서 빛나는 별이었으므로.
...응. 겨우 대답 하나를 뱉어낸 라더가 난간을 세게 쥐었다. 꼭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다. 제 발아래가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바랬다. 꿈이니 목표니 하는 것들이 스쳐 지나간 제 머릿속도 함께 하얗게 물들었다. 라더의 표정을 응시하던 각별은 구태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라더는 전부 알 수 있었다. 각별은 분명 제 선택을 믿은, 그리고 제 길을 응원하리라 마음먹은 자신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음을. 아. 라더가 다시금 숨을 뱉었다. 그래, 내가 어떻게 말리겠어. 정상을 좇던 이는 날아오르겠다 말하는 정상을 차마 붙잡지 못했다. 저의 오랜 간절함이, 그래, 각별에게서 평생 느끼지 못했던 그 절박한 희망이 처음으로 빛났던 탓으로.
또다시 정적. 이내 각별이 답했다. 고마워. 그래도 이 얘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라더가 눈을 끔벅였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서 밤이 찾아왔다. 언제 가는데? 다음 주 월요일. 금방이네. 응. 라더야. 왜.
나 없다고 너무 슬퍼하지도 말고. 어? 알겠어? 울지 마라. ... ... ... 뭘 이런 걸 갖고 울고 그러냐. 전교 일 등 하기 전엔 안 운다며. 아... 이제 할 수 있어서 우는 건가? 킥킥. 각별이 환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것 같은 해사한 웃음. 라더가 찢어질 듯 입술을 깨물었다. 야, 이 나쁜 새끼야. 그럼 안 우냐? 목소리가 잔뜩 메였다. 숨이 불규칙하게 끊어졌다. 눈밑이 벌게지도록 벅벅 비볐다. 제 손에 잡힌 각별의 옷자락이 이질적으로 차가웠다. 그 부드러운 감촉이 어색했다. 됐어. 나 잊지 마. 그리고 빨리 꺼져. 이제 내가... 일 등 할 거니까. 일 등. 일 등... 또 다시 생소한 감각이었다. 문득 라더는 제가 달려온 길의 의미를 잃은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웠다.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꿈. 꿈... 눈을 뜨면 깨어버릴 그런 꿈. 그럼에도 각별의 꿈은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라더는 십 년을 넘기는 시간만큼, 확신했다. 제가 아는 각별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날아오른 각별은 제가 원하는 바를 붙잡아낼 것이다.
각별은 꿈을 꾸고 있었다. 십 년 넘는 시간 동안 각별을 봐 왔던 라더조차도 모를 만큼, 그러니까, 아주 조용하고 간절하게 꿈을 좇고 있었다. 각별이 세상에게 비관적이었던 것도, 제 성적이며 진로와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던 것도, 하다못해 늘상 짓던 무거운 웃음마저도 전부 그 탓이었다. 라더는 자책도, 원망도 소용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제가 각별을 본 시간만큼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숨겼구나. 일부러, 말하지 않았구나. 자신을 쫓아 따라오는 제가 무너질까 봐, 목적성을 잃고 추락할까 봐. 어쩌면 미련하고 호구 같던 건 제 자신이 아니라 각별이었음을 라더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같이 놀기나 할 걸. 제가 각별의 성적을 부러워하고 그 위치와 승리를 부러워 할 때마다 각별이 어떠한 참담함을 느꼈을지, 라더는 차마 짐작할 수 없었다. 결국 도망치듯 사라진 각별에게 라더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케이지를 열고 날아오른 작은 새를, 라더는 붙잡을 수 없었다.
천재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김각별은 그저 평범한 열여덟, 그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라더는 각별을 포기할 수 없었다.
라더가 책상 위로 고개를 푹 떨구었다. 평소였으면 잠들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생각조차 하지 못 한 행동. 시야 안으로 책상 옆에 놓인 책꽃이가 들어왔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책꽂이 가장 위쪽 칸에 손을 뻗었다. 키가 닫지 않아 의자까지 끌고 와서 낑낑거리며 수많은 공책을 내렸다. 수학 공식이라던가, 영어 단어라던가 하는 것이 빼곡히 적힌 공책 수십 권. 라더는 차마 제 노력을 버리지 못했다. 악착같이 달려온 제 십팔 년을 전부 사라지게 하는 것만 같았다. 라더에게 발판이었던 그 모든 노력과도 같은 것들을, 가시적으로 드러내 놓지 않으면 전부 없는 것이 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낡은 종잇장이 마른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가끔 코피를 쏟은 흔적이 묻은, 어딘가엔 커피를 흘린 자국이 남은. 때로는 필기하다 졸아서 흘러간 글씨체와 화이트 자국이 남발한. 투박한 흔적 위로 눈물 자국이 겹쳐졌다. 큭큭. 라더가 실없이 웃었다. 각별을 꼭 닮은 무거운 웃음이었다. 김각별, 네가 쫓던 꿈은 뭐야. 내가 쫓던 너는 왜. 나는,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해...
전교 일 등이라는 목표를 명분으로 살아온 것은 사실 김각별을 동경했던 것일 뿐임을. 빛나는 그 사람을, 공부 잘 하고 좀 많이 미친 것 같아도 그래도 사람 좋아 보이는 그를 따랐던 것이었음을. 서라더는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나른한 전등 아래로 어린 열여덟의 발자국이 녹아내린다. 길을 잃은 소년은 마음껏, 그렇게 한없이, 밤을 꼬박 지새 제 모든 것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라더는 양껏 울며 제 모든 것을 풀어내었다.
진짜 다녀오겠습니다!
라더가 집을 나섰다. 등에는 배낭을 메고, 양 손엔 캐리어와 책이 잔뜩 쌓인 수레를 끌고서 걸음을 옮긴다. 표정이 가벼워 보인다. 옅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띵동,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느릿하게 문이 열리자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거울을 보며 잠시 옷매무새를 다듬고, 머리를 한 번 정리하고, 옷 소매를 탁탁 털고 캐리어를 다시금 잡는다.
그리고선 제 캐리어를 공동현관 앞에 잠시 두고 수레를 끌었다. 달달거리며 시끄럽게 우는 것이 꼭 저를 버리지 말라며 소리치는 것 같았다. 라더가 제 책들을 힐끗이며 바라봤다. 수레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후우. 짧은 숨을 내뱉었다. 하늘이 파랗다. 멀리서 비행기가 선을 그리며 비행한다. 새롭게 출발하기 완벽한 날씨. 라더는 다시금 좇기로 했다. 제 소망을, 진짜 목표를, 존재의 이유를. 라더는 꿈을 찾는다. 꾸깃해진 공책들이 줄로 묶여 바닥에 놓였다. 라더가 얕은 먼지를 한 번 쓸었다. 제 손에 덕지덕지 묻어나오는 미련들을 털어버렸다. 남은 것은 없다. 제 앞에 새로이 펼친 새하얀 도화지 한 장만이 있을 뿐이다. 활공하는 비행기와 함께, 흩날리는 먼지들과 함께, 후회도 미련도 강박도 함께 날아가기를. 잘 있어, 나의 열여덟 전부.
라더는 여행을 떠날 생각이었다. 조금 긴, 어쩌면 제 새로운 전부가 될 여행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