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소음님 (@White_noise_798)
3월. 새 학기. 봄. 이 세 개의 단어가 박잠뜰의 머릿속에 겉돈다. 아직은 낯선 새 교복을 입고, 이번에 새로 산 가방을 매고. 푸른색의 운동화를 신은 채 두꺼운 현관문을 열어젖힌다. 잠뜰을 반기는 해가 따스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봄의 향이 좋아서 얕은 미소를 머금고 왼발을 앞으로 뻗는다. 그에 이어 오른발도 앞으로 뻗는다. 다시 왼발, 또 다시 오른발. 머릿속에 펼쳐진 끝없는 박자에 맞추어 앞으로 향하기를 반복한다.
잠뜰이 사는 하이얀 빛깔의 주택가 길 가장자리에는 분홍빛 벚나무들이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매년 봄마다 볼 수 있는 흔한 3월 풍경. 하지만 그렇게 보고 또 봐도 절대 질리지 않는 이 풍경을 잠뜰은 참 좋아한다. 짙은 갈빛의 나무 기둥과 딸기우유가 떠오르는 연한 분홍빛 벚꽃의 조합은 어떠한 사람의 기분도 좋아지게 할 수 있다. 평소 같았으면 아침부터 일어나 학교에 가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해 덜 사라진 잠과 함께 겨우겨우 걸어갔을 텐데, 오늘은 걸음이 너무나도 가볍다. 잠뜰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괜스레 더 웃음이 나온다.
차가운 듯하면서도 시원한 초봄만의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진다. 새들이 짹짹거린다. 왼쪽 귀에 이어폰을 끼운다. 오른쪽 귀에는 끼우지 않는다. 푸르른 케이스가 안고 있는 휴대폰을 꺼내 좋아하는 음악을 모아놓았던 앱에 들어간다. 잠뜰은 밝고 잔잔하며 편안한 노래를 좋아한다. 봄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팝송과 마음이 따스해지는 케이팝 몇 곡이 잠뜰의 귀를 채웠다. 작고 큰 집들이 빼곡한 곳에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쭉 직진하면 학교가 나온다. 예비 소집일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가보지 못 했던 한울 고등학교를 향해 쉬지 않고 바삐 걸어간다.
어, 잠뜰!
어, 정공룡이다. 같은 초등학교 졸업한 후 중학교까지 같이 다녔던 열여섯살 친한 동생 정공룡. 아직 달라지지 않은 교복을 입고, 변함없는 짙은 녹색의 가방을 맨 공룡이 잠뜰과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누군가와 함께 옆에서 걸어 나온다. 거의 두 달 가까이 못 보다가 오랜만에 보니 그만큼 반가운 기분이 든다. 야, 정공룡. 누구야? 아, 초등학교 중학교 같이 다녔던 친구. 님이랑 동갑임~. 아. 흑장발의 그 사람은 노란 눈동자로 잠뜰을 바라본다. 잠뜰 역시 그 사람을 바라본다. 아, 잠뜰! 지난 방학에 우리 집 앞집으로 이사 온 김각별! 공룡은 잠뜰과 각별에게 서로를 소개해준다. 같은 나이에 같은 학교인 것을 보아서는 앞으로 많이 마주칠 수많은 사이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적어도 잠뜰은, 그렇게 느꼈다.
잠뜰은 살며시 오른쪽 손을 들어 흔들며 인사했다. 안녕! 하고. 작게 미소를 품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각별도 그런 행동을 보자 오른쪽 손을 흔들어 함께 인사했다. 아, 안녕. 공룡이 튀지 않는 손목시계를 쳐다보더니 나 오늘 개학이라 조금 일찍 가야 하는데, 입학도 그렇지 않아? 하고 둘에게 묻는다. 아, 맞아. 빨리 가자, 늦기 전에! 그 후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은 채 약간의 속도를 내어 빠르게 걷기만 한다. 공룡의 중학교는 고등학교에 가는 길에서 중간에 오른쪽으로 빠져야 한다. 손을 크게 흔들며 이따 봐! 하고 달려간다. 잠뜰과 각별은 그대로 계속 직진한다. 봄의 향기가 느껴진다. 정적이 흐른다. 2020년 3월 2일. 이들은 그렇게 인연이 시작되었다.
정작 말을 하는 사람은 단 한 명 뿐인데도, 괜히 주변이 북적거린다는 생각이 든다. 교장 선생님의 마이크에는 에코가 들어있지 않은데도, 강당이 워낙 높고 넓은지라 울리는 게 없지 않아 있었다. 모든 신입생들이 반별로 줄을 만들어 서 있다. 잠뜰은 가장 왼쪽 중간에 섰다. 저기 저 앞에서 익숙한 별 머리끈의 흑장발 학생의 뒷모습이 눈에 살며시 들어왔다. 아, 그러고 보니... 같은 반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익숙하지 않은 인파 속에서 그나마 아는 사람을 보자 그제야 조금 떨리는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따가 입학식 끝나면 얘기라도 꺼내 볼까. 꽤 자주 볼 사이가 될 것 같아 먼저 다가갈까 고민해보기도 하였다. 입학식만의 두근거리는 분위기와 강당 위 작은 창에서 들어오는 따스한 햇빛, 그리고 질리기까지는 하지 않는 정도의 교장 선생님의 입학식 연설이 잠뜰의 눈을 지나 마음속에 박힌다. 곧장 연설이 끝나고, 여기저기서 작은 박수 소리가 들린다. 여기서 입학식을 마칩니다, 학생들은 각 반 담임교사의 안내를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마이크에서 약간의 잡음이 들리더니 이내 꺼지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크디큰 강당을 나와 소박하고 아늑한 교실로 들어간다. 처음 느껴보는 한울 고등학교의 교실은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안고 있었다. '1-1' 이 고딕체로 박혀있는 팻말이 교실과 복도를 연결하는 창밖으로 살며시 보여온다. 침묵 속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만이 이 교실을 채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말들, 고등학생이니까 열심히 해야 한다는 뻔한 말들만으로 시간을 채운다. 앞으로 다른 선생님들한테, 매 학기 매 학년마다 똑같은 말만 들을 생각을 하니, 거기에서 나아가 더욱 압박을 받을 생각까지 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래도 잠뜰은 담임 선생님의 따뜻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동자에서 시선을 틀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입학하는 날이라고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지 않았다. 앞으로 한 교시만 더 들으면 하교였다. 잠뜰은 자신의 무의식이 아무렇게나 끄적여 내려가던 무선 노트를 정리하고, 창밖을 바라봤다. 전체적으로 아직 친한 환경이 아니라서 그런지 쉬는 시간에도 교실이 많이 시끄럽지는 않았다. 창문 밖으로 운동장과 그 옆에 있는 수많은 벚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낮은 층이라서 꽃이 하나하나 더 잘 보였다. 분홍빛으로 물든 학교가 좋았다. 잠뜰이 멍하니 바깥 풍경을 즐기고 있을 때 뒤쪽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 잠뜰. 아, 각별! 숨쉬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어색한 분위기에 갑갑해 죽을 것만 같던 잠뜰의 표정이 밝아졌다. 우리 같은 반이더라. 잠뜰이 웃었다. 각별도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많이 있지 않았지만 얼굴은 꽤 밝아 보였다. 잠뜰과 각별의 스마트폰이 동시에 울렸다.
[공룡]
님들 학교 언제 끝남??
나 오늘 완전 일찍 끝났는데 너무 배고픔
같이 떡볶이 먹으러 가자
ㅠㅜㅠㅜㅠㅜㅠ
얘는 무슨 벌써 단톡까지 팠어, 속으로 헛웃음을 내뱉으며 답장했다.
[잠뜰]
우리 한 교시 남았음 금방 끝날 듯~
[공룡]
헐 한 교시나 기다려야 하는구나 너무 가혹한데
[각별]
ㄱㅊ 단축 수업
[공룡]
아 오키 그쪽 가서 기다림!!!
여기 근처에 떡볶이 집 있나? 중학교 근처에는 많았는데 여기는 모르겠네. 그냥 우리가 그쪽으로 간다고 할까? 이미 출발했을 듯. 대화하는 수가 늘어날 수록 마음은 더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2020년 3월 2일. 이들은 그렇게 인연이 시작되었다. 가방을 맨 채 컵 떡볶이 하나씩을 손에 들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모조리 늘어놓으며 느꼈던 봄의 바람을 이들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잊지 못한다. 낯을 가릴 땐 죽도록 가리지만, 낯을 가리지 않을 때는 죽도록 가리지 않는 잠뜰은 새로운 친구를 만났다는 사실에 신이 나 공룡과 함께 더 밝게 떠들어대었고, 편한 사람이 아니면 혼자가 제일 좋았던 각별은 그런 잠뜰과 공룡의 말에 가볍고 시원하게 반응하며 경청해주었다.
[공룡]
이따 학교 학원 끝나고 나랑 PC방 갈 각별 잠뜰 구함~
공룡은 항상 이 사이에 서서 주도적으로 만남을 이끌었다. 공룡과 잠뜰, 각별이 그렇게 친해질 수 있었던 것도 공룡의 영향이 매우 컸다. 모두의 학업 스케줄이 끝나면 매일 다 같이 동네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며 놀기 바쁘게 지냈다. 그렇게 셋은 어느새 점점 서로가 편해지기 시작하였고, 잠뜰과 각별은 어색한 첫 만남에서 벗어나 누구보다 합이 잘 맞는 친구 사이로 발전하였다. 어느 날은 다 같이 만화방에 가 에어컨 바람을 만끽하는 날도 있었고, 어느 날은 서로의 체육대회를 응원하러 가기도 했었다. 모두 두꺼운 패딩을 껴입은 채 따뜻한 음료수를 마시는 날도 있었다. 다시, 어느 날은 동네에 핀 꽃들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었고, 어느 날은 다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기도 했었다. 어느 날은 함께 단풍을 보러 짧은 여행을 가기도 했고, 또 다른 어느 날은 모두 목도리를 두른 채 붕어빵 하나씩 잡고 학교 거리를 걷기도 했다. 그리고 또 다시 어느 날은...
얘들아, 우리 오늘 개학한 경험으로... 다 같이 벚꽃 축제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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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김각별, 우리는 언제 처음 만났더라.
그게... 재작년 3월이네.
헐~ 그게 벌써 재작년이야? 시간 완전 빠르다. 그치?
그러게.
이들의 첫 인연은 다소 평범한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어색하고 낯선 분위기 속 서로 주고받는 시선, 애써 흔들어 보이는 오른쪽 손과 가식보다는 진심에 가까운 밝은 웃음. 평범의 한가운데에서 이어진 이들의 인연은, 수많은 삶의 시간 속에서 잠시 스쳐 지나갈 줄만 알았던 서로의 인연은 어느새 2년이라는 시간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청춘 속에는 서로가 있을 거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다. 2022년 3월의 하늘은 2020년 3월의 하늘과 똑같이, 푸르고 또 푸르렀다.